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애나 스펜서 (문단 편집) === 외로운 어린시절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diana spencer.jpg|width=100%]]}}}|| || '''{{{#fff 성공회 유아세례식에서 부모와 함께}}}''' || 1961년 7월 1일, 다이애나 스펜서는 [[영국]] [[노퍽]] 주 [[엘리자베스 2세]]의 [[별장]]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올소프 자작 존 스펜서[* 1924~1992. 후에 스펜서 백작위를 승계받아 8대 스펜서 백작이 된다.]와 올소프 자작 부인 프랜시스[* 1936~2004.]의 3녀로 태어났다. 이름은 먼 조상인 [[존 처칠]]의 외손녀이자 베드퍼드 공작부인이었던 다이애나로부터 따왔다.[* 베드퍼드 공작부인 다이애나 또한 [[조지 2세]]의 아들 [[프레더릭 루이|프레더릭 왕세자]]의 유력한 왕세자비 후보였고, 외할머니 [[사라 제닝스|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]]도 아끼는 손녀를 왕실로 시집보내기 위해 애썼으나, 결국 그 자리는 [[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|독일 출신 공주]]에게 돌아갔다.] 다이애나가 태어난 샌드링엄하우스는 과거 [[엘리자베스 2세]]가 외조부 퍼모이 남작에게 내어준 곳으로, 아버지가 백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 외갓집이기도 한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. 훗날 리모델링 중인 샌드링엄에서 그녀가 키를 재던 문을 발견한 [[찰스 3세]]가 그 문을 떼와서 선물해 줬다고 한다.[* 아이러니하게 일찍이 파탄나 버린 부부 사이와는 별개로, 찰스 3세는 결혼생활 동안 다이애나의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선물들을 많이 해줬다.]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IMG_7063.jpg|width=100%]]}}}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diana1967.jpg|width=100%]]}}}|| || 1963년 || 1967년 ||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행했다고 한다. 다이애나의 부모는 후계자가 될 아들 출산,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, 매일같이 큰 소리로 다투었고 어머니 프랜시스는 자주 울었다고 한다. 이외에도 [[유모]]가 지나치게 자주 바뀌는 등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. 심지어 어머니의 외도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문 뒤에 숨어서 지켜볼 때도 있었다. 결국 다이애나가 6살이 되던 1967년에 다른 남자와 집을 나가버린 프랜시스로 인해 두 사람의 [[별거]]가 시작되었고, 처음에는 어머니와 함께 [[런던]]에서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인해 다시 노퍽으로 돌아갔다. 부모가 정식으로 [[이혼]]한 것은 다이애나가 8살 때의 일이었다. 아버지 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[[재혼]]했으며, 이에 다이애나를 포함한 4남매는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다. 다이애나는 매주 주말마다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를 보러갔는데, 어머니는 자식들이 떠나기 전날 밤마다 "너희가 내일 가는 게 슬프다"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. 이는 당시 9살이었던 다이애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, 남동생인 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. 다만 프랜시스의 이 말은 공수표에 가까웠고, 스펜서 4남매는 사실상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태였다. 언니들과 남동생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체념했지만, 다이애나만이 문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고 한다. 아버지 존 스펜서는 그 시대 상류층 남성들이 그러하듯 체면과 [[명성]]을 비롯해 다른 일을 언제나 굉장히 중요시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[*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, 귀족 남성들은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. 다이애나의 시할머니이자 [[엘리자베스 2세]]의 어머니인 [[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|엘리자베스 왕대비]]도 어린 시절 아버지와는 [[편지]]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.] 그의 저택에서는 늘 파티가 열렸다. 그래도 아버지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, 다이애나의 빈 마음 속이 온전히 채워지지는 못했다. 부모의 이혼뿐만 아니라 두 언니들이 [[켄트]]의 [[기숙학교]]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샌드링엄에는 다이애나와 남동생 찰스 단 둘뿐이었던 데다, "백작부인이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도망갔다"라며 수근거리는 상류사회의 시선도 견뎌야 하는 등,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예민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. 이로 인해 당연히 새어머니인 레인과도 친해지지 못했고, 그녀를 [[산성비]]라고 불렀을 정도로 사이가 극악이었다고 한다. 레인의 사치스러운 씀씀이에 분노한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, 훗날 아버지가 사망하고 백작이 되자마자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.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다고 증명할 수 없으면 짐도 챙겨가지 못하게 했으며,[* 레인의 방에는 [[루이비통]] 수트케이스 4개가 있었는데, 이니셜 S가 엠보싱되어 있다는 이유로 다이애나가 모두 뺏었기 때문에 짐을 쓰레기봉투에 들고 가야 했다고 한다.] 그녀의 고용인들도 예고 없이 모조리 해고했을 정도였다. 4백만 파운드와 메이페어의 주택[* [[뉴욕]]이나 [[런던]] 하면 생각나는 위로 길쭉하고 좁은 형태의 타운하우스이다.]을 내주기는 했지만, 스펜서 남매가 계모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. 명문 [[사립학교]]인 [[노퍽]]의 리들스워스 홀과 [[켄트]]의 웨스트 히스 여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. 두 학교는 광대한 자연에 둘러싸인 멋진 환경 속의 장엄한 저택이었다. 리들스워스 홀은 원래 귀족들의 저택으로 사용되었었고[* 2023년 4월에 폐교됐다.], 웨스트 히스 여학교는 다이애나의 재학 시절만 해도 [[상류층]] 여학생 100여 명만을 모아 교육하던 소수정예의 귀족학교였다.[* 현재는 재정난으로 1997년에 매각되어 이름도 바뀌고, 학습 부진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[[남녀공학]]으로 완전히 달라졌다.] 학창 시절의 다이애나는 [[스포츠]] 만능으로 [[수영]]과 [[테니스]], 댄스를 잘했다.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좋아했으며, 그 중에서도 [[발레]]와 [[피아노]]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. 다이애나가 입학하고 얼마 뒤 학교 안에 커다란 홀이 생겼는데, [[밤]]이 되면 그곳에서 몰래 [[음악]]을 틀고 몇 시간씩 발레 연습을 하곤 했다. 다이애나는 학교를 무척 좋아했고,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짓궂은 학생이었다.[* 여담으로 이때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[[틸다 스윈튼]]이었다.]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lady-diana-spencer-the-future-princess-of-wales-du.jpg|width=100%]]}}} || || 1971년 || 14살이던 1975년, 친할아버지 7대 스펜서 백작 앨버트 스펜서(Albert Spencer)[* 생몰년도: 1892년 ~ 1975년]이 사망하자 당시 올소프 자작이었던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했고, 역대 스펜서 백작들의 가족저인 울소프 저택(Althrop)에 입성했다. 이때 호칭도 [[자작(작위)|자작]]의 딸인 아너러블(The Honorable)에서 [[백작]]의 딸인 [[레이디]]로 격상되어 '''레이디 다이애나(Lady Diana)'''라고 불리게 된다. 고등학교 시절에는 [[로맨스 소설]]을 즐겨 읽었으며, 특히 유명 작가 바버라 커틀랜드[* '로맨스 소설계의 대모'라는 호칭도 있을 정도로 영국 로맨스 소설계에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이자 현재까지 마니아 팬층도 두터운 작가다.]의 소설을 좋아했다. 참고로 이 사람의 딸이 바로 앞서 말한 새어머니 레인 맥코크데일. 의붓손녀가 자기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초기작 몇 권을 보내줬다고.[*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자 한동안 서운해했다고 한다. 참고로 딸인 레인에 대하여 5대 서덜랜드 백작의 딸이거나, [[켄트 공작 조지 왕자]]의 딸이라고 주장했다.]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 푹 빠져 학업 성적이 나빠진 나머지 번번이 [[낙제]]까지 했을 정도로 항상 동화 속 왕자님과의 낭만적인 사랑을 꿈꿨다고. 다이애나의 언니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대단한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포부에 가득 차있는 그녀를 [[공작부인]]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. 이처럼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다이애나의 인생에 걸쳐 [[트라우마]]가 되었다. 부모는 이혼 후에도 본인들의 일에만 몰두하느라 조용하고 섬세한 셋째딸 다이애나에게 깊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소극적이고 [[내성적]]인 성격으로 자랐다.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언론의 과도한 집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